발타자르 그라시안,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장 드 라 브뤼예르 지음
한상복 엮음
표지 그림도 마음에 들었고 제목도 마음에 들고 전체적인 느낌이 좋아서 고른 책이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를 필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공감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나중에 직장인이 되고 나서 읽는다면 전혀 다르게 읽힐 것 같은 책이다.
프롤로그
어릴 때부터 “이기적으로 살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훌륭한 사람이란 남을 위해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이를 뜻했다.
그런데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한 푼의 이익이라도 마른 수건 쥐어짜듯 만들어내야 ‘밥값 한다’라는 평을 간신히 듣게 되었다.
경쟁자에게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모순이다.
어쩌다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욕을 먹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게 되고, 남의 눈치를 보며 온갖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지치게 된다.
지치고 힘들면 ’남의 탓‘이다.
열심히 좋은 사람 역할을 했는데 응분의 대가를 돌려받지 못했으니까.
내 삶이 자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 모순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시스템 자체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세 명의 현자는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너무 멀어지지도 말고 상대의 필요와 나의 필요를 조화시켜 현명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남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먼저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때로는 위악의 뉘앙스까지 동원해 역설한다.

회사는 아니지만 상사가 있다는 점이 공통으로 작용할만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을 읽은지는 며칠 지났지만, 갑자기 읽었던 부분이 생각나 글을 적는다.
흔한 장녀라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아르바이트 때도 그렇고 처음부터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혼나면 안 된다는 모범생 이미지가 스스로에게 각인이 되어서 그런걸까
부담감이 크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나에게도 좋지 않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 특히 사장님과 함께 일한다면 사장님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기 때문에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기대치를 높여놔서 이것저것 많이 시킬수록 내가 일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아르바이트 입장에선 좋지 않다.
물론 잔실수를 하면서 꾸중을 들어야 기억에 잘 남는 건 맞다.
빨리 성장하고 싶다면 많이 실수하는 것이 좋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인생은 도미노같다.
내가 세워둔 도미노는 앞에서 바람이 불기도 하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누군가 건드리기도 하고 혹은 내가 건드리는 바람에 계속 쓰러진다.
난 그 쓰러진 도미노를 계속 세워나간다.
쓰러져도 세워나간다.
쓰러졌다고 해서 하루종일 좌절하고 울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세워야 다시 쌓을 수 있는 것이고 세울 거니까.
그리고 살아있는 한, 세울 수 밖에 없다.
그게 인생인 것 같다.
(밤에 쓴 거라 지금 보니 너무 오글거린다 웩)


오늘 갑자기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첫번째는, 나는 왜 그 선배를 무시했을까?
입 밖으로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말투, 태도, 억양, 대화 소재에서 다 티가 났을 것이다.
철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 본인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집에 가 침대에 누워 나처럼 철학책을 읽을 것 같은 ‘남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왜 그들을 무시할까?
그들이 나보다 더 뛰어난 생각을 갖고 있을까봐?
그들이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일까봐?
내가 아는 주변의 ‘여자들’은 철학에 관심이 없으니까?
철학적인 질문과 고민은 나의 고유한 영역이고 싶은데, 그들도 나와 같다면 혹은 더 뛰어나다면 그들은 나의 정체성에 줄을 긋는 존재라서?
철학적인 생각을 많이 하지만 나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는 남자는 공감과 연민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나는 그것을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내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느 정도의 남자’라면 난 그들을 싫어한다. 되려, 무시했었다.
두번째는, 우정의 무거움이다.
난 친구가 잘될 때 진심으로 기뻐한 적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질투심에 별 것 아닌 것 너무 일을 크게 벌리는 것 아니냐며 하품을 하기도 했다.
사실 내 속마음은 ‘친구가 부럽다’였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모든 감정과 모든 일들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표현들은 보통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나타나는 방어기제다.
화를 내면 내가 불안하다는 것이고, 짜증을 부리면 질투가 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래왔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왜 나는 친구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지?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걸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척’을 해야했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 자체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축하해주는 척, 덕분에 나도 기쁘다는 척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어차피 인간은 남에게 생긴 좋은 일에 온전히 기뻐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가면은 나에게도, 그리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득이 된다.
가면이 나쁜 것이 아니다.
가면은 써야한다. 내 인생의 페르소나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피곤해질 것 같기는 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가면을 나도 모르게 쉽게 바꿔쓰는 방법이 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내 무의식 속의 악마가 얼굴을 비추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버리는 것이다.
’와 너무 멋진 무대였어.. 얼마나 고생했을까?‘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한다는 건 정말 의미있는 일인 것 같아. 학문으로 공부를 한다는 게 대단해‘
그러면, 내가 날 속인다.
나는 이미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으니, 나는 위에서 말한 내용들을 진심으로 마음속에 담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면 쓰기,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꽤 괜찮은 방법이 하나 더 있는데, ‘나를 낮추기’이다.
사람들은 본인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기분이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칭찬하라고 하는 것이고, 겸손해지라고 하는 것 같다.
적어도 그렇게만 한다면 내 인생이 덜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이걸 굉장히 잘하는 친구가 내 주변에 한 명 있는데, 난 그 친구를 참 괜찮게 생각한다.





한동안 ‘자랑’이라는 주제에 매몰되어있었던 적이 있다.
어딘가에 적어놨던 것 같은데 그때도 정답을 몰라서 버렸을 수도 있다.
항상 이 주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한 선배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스타그램이 생각난다.
내 기억의 그 선배는 밉지 않게 자랑을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자랑도 밉지 않게 진심으로 축하하며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그 당시 나는 자랑을 한다는 것은 대놓고 내가 더 높다는 생각을 표출하는 행위이기에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계속 끌고 나가려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자랑, 인스타에 매번 올라오는 사진과 글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보는 족족 내가 낮아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자랑을 한다는 것은 나를 깔보고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에 순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시기와 질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준이 다소 높은.
그리고 그 시기와 질투가 점점 쌓이다가 7-8월이나 1-2월이 되면 폭발할 기회가 생겨 아예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난 그때 ‘아, 자랑은 기브앤테이크구나. 자랑은 해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라는 장치도 소위 자랑 은행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업로드를 통해 나의 부러움을 출금해갔다면, 나도 그들의 부러움을 출금해와야 하는 것이다.
난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성숙하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해서, 또는 그럴 자신이 없어서 자랑을 받지도, 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은 인간이라면 다 느끼는 것이다.
안 느낄 수도 없고, 안 느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가지인 것 같다.
남들도 내 부러움을 출금해가지 못하게 하거나, 남들이 출금해간만큼 나도 그들의 계좌에서 출금해가거나.
첫 번째 방법은 실현 불가능하다.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원시시대처럼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선배처럼 두 번째 방법을 택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면을 쓰는 것, 나도 나의 계좌를 잘 관리하는 것
‘자랑은 유료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 서울이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여성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기에 나 스스로 계속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사회에 소속되려 한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인 것 같다.



어제 밤에 스노우볼링 효과를 몸소 체감했다.
나의 눈덩이는 책에 나온 직장인의 눈덩이보다 매우 빨리 커졌다.
1~2시간 만에 나를 잠재우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커졌던 것 같다.
난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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